
회복탄력성은 단지 재무제표의 안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험회사가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위험을 분산하며, 지속가능한 성장경로를 찾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균형이 전제돼야 한다. 보험회사 내부의 운영요소뿐만 아니라 소비자를 포함하는 이해관계자 간의 관계, 시장 경쟁 및 질서를 규율하는 규제환경 등 생태계를 구성하는 각 축이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유기적으로 작동해야만 슬롯존은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첫째, 슬롯존수익과 투자수익 간의 균형이 중요하다. 한쪽 수익원에 편중되면 환경 변화에 취약한 구조가 형성된다. 새 국제회계기준(IFRS17)과 신지급여력제도(K-ICS) 도입 이후 보장성 상품 중심의 영업이 강화됐지만, 해당 제도는 효율적인 자산운용 역량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안정적 수익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슬롯존 본연의 기능과 자산운용이 조화를 이루는 구조가 필요하다. 둘째, 단기성과와 장기책임 간의 균형이다. 최근 슬롯존시장은 무·저해지, 단기납 등 더 복잡한 상품 중심으로 재편되고, 신계약 확대를 위한 사업비 지출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슬롯존은 본질적으로 장기계약에 기반한 신뢰 산업이다.단기 수익에 치중한 전략은 계약 유지율을 떨어뜨리고, 장기적인 고객이탈과 신뢰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책임 이행을 중심에 둔 장기전략이 요구된다. 셋째, 사업모형과 소비자 기반의 균형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슬롯존시장은 30~50대 중심의 유사한 보장성 상품에 집중돼 있으며, 고령층 대상 상품은 미비하고 MZ세대의 관심도 낮은 편이다. 디지털 채널 확대 역시 소비자의 체감과는 괴리가 크다. 다양한 생애주기와 니즈를 반영한 맞춤형 상품과 유통채널 혁신이 병행돼야 시장의 포용성과 회복력이 강화될 수 있다. 넷째, 주주와 이해관계자 간의 균형이다. 과거에는 주주의 이익이 경영의 최우선 가치였지만 이제는 슬롯존계약자, 임직원, 판매채널,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신뢰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한다. ESG 경영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경영판단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해관계자 관점의 균형 잡힌 전략이 장기 경쟁력의 핵심으로 작동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슬롯존 생태계 전반의 균형이 필요하다. 외국계 보험회사의 철수와 중소 보험회사의 위축은 산업의 다양성을 약화시키고, 사업모형의 획일화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보험규제가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작동할 경우 혁신적이고 유연한 사업모형의 시장진입을 가로막을 수 있다. 이는 경쟁 부족과 서비스 획일화를 유발하고, 결국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후생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당국은 규제의 목적과 효과를 균형 있게 조율하며, 다양한 사업자가 공존할 수 있는 유연한 시장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슬롯존은 단기수익을 추구하는 산업이 아니라 개인·기업·사회가 직면한 리스크를 흡수하고 관리하는 사회안전망의 핵심 인프라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슬롯존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특정 상품, 계층, 전략에 편중된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균형과 다양성이 살아 있는 생태계만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회복탄력성을 갖추고, 미래에 대응할 수 있는 슬롯존의 기반이 될 것이다.
안철경 슬롯존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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